깊은 상흔 지닌 채 담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얘기

깊은 상흔 지닌 채 담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얘기

입력 2013-03-20 00:00
수정 2013-03-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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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 5년만의 신작 단편소설집 ‘일요일의 철학’

조경란(44)은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 가기 전 6년 동안 ‘잉여인간’처럼 살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렇다 할 인간관계도 없었다. 온종일 방에 틀어박혀 책장만 넘겼다. 그저 괴롭고 암담했다. 세월을 무심코 흘려보내던 어느 날 새벽, 불현듯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문학에는 그렇게 발을 디뎠다.

조경란
조경란
사회적 낙오자로 살던 이때의 경험은 역설적으로 그에게 문학적 자양분을 제공했다. 5년 만에 펴낸 단편소설집 ‘일요일의 철학’(창비 펴냄)도 마찬가지. ‘파종’, ‘학습의 생(生)’, ‘봉천동의 유령’ 등 8편의 단편에는 단단하게 응축된 작가의 삶이 투영됐다. 더욱 간결하고 섬세하게 다듬어진 서사마다 깊은 상흔을 지닌 채 담담하게 살아가는 인물들의 얘기가 묻어난다. 때론 절실하고 아름답게 잔잔한 여운을 던진다.

작가는 원래 섬세한 묘사를 통해 인간의 고독과 우수를 부각시키는 독특한 문체를 보여 왔다. 올해로 등단 18년차. 그간 소설집과 산문집 등 13권의 책을 낸 작가는 아직도 “왜 소설을 쓰는지 잘 모른다”고 말한다. 단지 분명한 것은 쓰고 있을 때가 가장 즐겁다는 사실이다.

소설집을 여는 단편 ‘파종’. 서로 상처가 문신처럼 새겨진 가족이 등장한다. 너덜너덜한 가족관계는 일본에 사는 여동생이 팔을 다치면서 전환점을 맞는다. 대학 교무처에서 13년간 일하다 실수로 일자리를 잃은 주인공(이이송)은 아버지와 일본행 비행기에 오른다. 동생 결혼식 때도 초대받지 못했던 주인공이 일본으로 가 동생의 살림살이를 떠맡았다. 일본에서 한 달 정도 지내는 동안 이들 가족에겐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아버지가 꽃씨로 알고 시장에서 사온 시금치 씨앗이 싹을 틔웠다는 것을 제외하면…. 시금치 씨앗은 어느새 가족의 공통 관심사가 된다. 더운 날씨를 뚫고 싹을 틔우는 과정은 헐거웠던 가족 관계에 희망이 싹트리라는 점을 암시한다. 소설은 주인공이 아버지처럼 술에 의지해 살아온 것은 한날한시에 죽은 남편과 아이 탓이라는 슬픈 기억도 읊조린다. 동생이 깁스를 푼 이튿날 주인공과 아버지, 조카들은 함께 도쿄 타워를 찾는다. 흰 벚꽃 아래에서 발을 굴러대며 웃음을 터뜨린다.

표제작인 ‘일요일의 철학’은 작가를 연상시키는 소설가가 미국의 한 낯선 소도시에서 한 철을 보내는 이야기다. 역시 특별한 사건 없이 소소한 이야기로 채워진다. 무중력 상태를 배회하는 것 같던 주인공은 인라인 스케이팅에 도전한다. 마흔 살 생일을 목전에 둔 어느 일요일 오후, 소설가는 스케이트를 타며 말한다. “나는 지금 추락하는 것일까?…이것이 나의 속도일까?”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2013-03-2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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