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케이지 곡 페달 조정에 몰린 관광객
2001년 시작해 2640년 9월 5일 끝나한 음씩 연주… 첫 음 바뀌는 데 18개월
“빠름이 미덕인 시대, 느림의 가치 대변”

할버슈타트 AP 연합뉴스
독일 할버슈타트의 세인트 부르카르디 성당에서 지난 2011년부터 연주 중인 존 케이지의 음악 ‘Organ2/ASLSP’가 5일(현지시간) 7년 만에 화음이 바뀐 가운데, 이날 자동 오르간의 페달이 조정되는 장면을 지켜보기 위해 수백명의 방문객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할버슈타트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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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제목이 ‘Organ2/ASLSP’인 이 작품은 한 곡을 연주하는 데 무려 639년이 걸려 ‘세상에서 가장 느리고 긴 음악’으로 통칭된다. 2001년 9월 5일에 연주를 시작해 2640년 9월 5일 연주가 끝날 예정이다. 다음번 예정된 코드 변화는 오는 2022년 2월 5일이다. 9월 5일은 케이지의 생일이기도 해서 의미가 더욱 남달랐다. 현지 음악매체들은 유튜브를 통해 성당 안에서 화음이 바뀌는 장면을 앞다퉈 전달하기도 했다.
20세기 대표적 전위 음악가로 꼽히는 케이지는 1985년 피아노용으로 이 작품을 작곡했고 이후 1987년 오르간용으로 편곡했다. ‘빠름’을 숭배하는 현대인의 가치관에 대항하기 위한 메시지로, 짧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몇 년에 한 음씩 연주된다. 연주 시작 이후 첫 음이 바뀌는 데 18개월이 걸렸고 앞서 2008년 7월과 11월, 2013년 9월에 음이 바뀌었다.

‘Organ2/ASLSP’ 악보 첫 부분.
뮌헨예술원 명예교수인 토마스 기르스트는 저서 ‘세상의 모든 시간’에서 “온갖 빠름과 ‘속성 코스’가 미덕처럼 자리를 잡은 시대에 느림의 가치를 대변하는 대표적 예술작품으로 639년 동안 공연되는 케이지의 오르간 연주가 있다”고 꼽기도 했다.
케이지는 연주자·작곡가의 의도는 물론 부작위, 관객 숨소리, 침묵 등 ‘우연적인 모든 소리가 음악’이라는 ‘우연성의 음악’을 개척한 현대음악의 선구자다. 1952년 5월 초연한 ‘4분 33초’로 세계 음악계에 반향을 일으키며 명성을 얻었다. 당시 그는 피아노 앞에서 건반 덮개를 닫고 가만히 앉아 이따금 악보를 넘기다 4분 33초가 지나자 도로 덮개를 열고 퇴장했다. 한국 출신 작곡가 윤이상,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과도 교류했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2020-09-07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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