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가치와 질서 퇴조속 ‘인종’ ‘성’ ‘다양성’ 부각전통적 보수층 반발속 공화당내 ‘친절한 보수론’ 대두
“하나님께서는 저희에게 변치 않은 삶의 기준을 주셨지만, 사회는 바뀌고 있습니다. ‘트렌스젠더 쇼’를 선전하는 TV광고를 보기도 했습니다”(제프 혼츠 침례교 목사)”자연의 법칙을 어기는 건 조율 안 된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소금과 밀가루, 설탕을 적절히 섞지 않은 빵을 굽는 것과 마찬가집니다.”(마이크 허커비 공화당 대선후보)
미국 워싱턴포스트가 28일(이하 현지시간) 신문에서 소개한 두 보수인사의 대화 내용이다. 지난 26일 연방 대법원의 동성결혼 합법화 판결 이후 미국의 보수세력이 겪는 ‘정신적 아노미’의 단면을 읽게 해준다.
지금 미국은 백인 중심주의와 서구적 전통에 기반한 기존의 ‘질서’가 퇴조하고 ‘인종’과 ‘성’, ‘다양성’이라는 새로운 가치가 들어서는 문화적 전환기를 관통하는 듯하다.
올림픽 육상 챔피언 출신의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한 케이틀린 제너(66)가 스타덤에 오르는가 하면 프란치스코 교황이 ‘기후변화’에 대처할 것을 호소하는 회칙을 제정한 것은 기존의 가치체계에 익숙한 미국 보수층에게는 엄청난 도전이 되고 있다.
남북전쟁 당시 남부 13개주의 단합을 상징해온 남부연합기가 퇴출되는 현상은 남부에 전통적 지지기반을 둔 공화당에게는 정신적 혼란을 주고 있다.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대법원의 동성결혼 합법화 판결이다. 단순히 성적 소수집단의 권리를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차원을 넘어 미국 사회가 새롭고 다양한 가치를 포용하는 ‘진보’ 쪽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평가에서다.
특히 최후의 보루처럼 여겨온 대법원이 ‘왼쪽’으로 향하는 듯한 흐름을 보이는 게 보수세력에게는 더욱 아픈 대목이다. 오바마케어와 공정주택법에 이어 동성결혼까지 모두 진보진영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가 됐기 때문이다.
여론의 영향을 받아 판사 개인의 의견이나 정치적 고려를 반영한 판결을 하는 ‘사법적 적극주의’가 힘을 얻고 있고 이것이 보수주의적이었던 사법부를 ‘좌클릭’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1990년대 중반 신보수주의 물결의 주역으로 평가됐던 뉴트 깅그리치 전 하원의장은 “우리는 새로운 진보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며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라고 소회를 털어놓았다.
물론 보수세력의 ‘조건반사적 저항’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일부 공화당 대선후보들이 나서서 전통적인 기독교 가치를 토대로 무너진 도덕과 윤리를 바로 세우라는 지지기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다.
침례교회 목사 출신인 마이크 허커비 후보는 27일 아이오와 주 유세에서 “우리는 단순히 문화의 온도를 반영하는 ‘온도계’가 아니라 온도를 적절한 수준으로 맞추는 ‘온도조절기’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릭 샌토럼 전 펜실베이니아 상원의원은 “동성결혼 판결은 마치 ‘동성결혼 반대=인종 차별주의자’라는 거짓말에 기반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크리스 크리스티 뉴저지 주지사는 “결혼은 이성 간의 결합이며 이를 바꾸려면 국민투표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유일한 여성 후보인 칼리 피오리나 전 HP 최고경영자(CEO)도 “공공장소에서(동성결혼을 거부할 수 있는) 종교적 자유에 초점을 맞추자”고 말했다.
주목할 대목은 이 같은 목소리가 과거와는 달리 확실한 ‘동력’을 받지 못하는 분위기라는 점이다. 미국 사회와 유권자들의 인식에 커다란 변화의 흐름이 형성되고 있음을 공화당의 주류도 느끼고 있다는 얘기다.
중도 온건성향의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는 물론 신 보수주의 기수인 스콧 워커 위스콘신 주지사 등도 동성결혼에는 반대하면서도 대법원의 결정 자체를 존중해야 한다는 모호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2004년 대선때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신보수주의 기치를 내걸고 동성결혼 반대를 정치적 무기로 삼아 재선에 성공했던 것과는 ‘상전벽해’다.
공화당 내부에서는 이미 내년 대선을 겨냥한 노선 투쟁이 시작되는 분위기다.
팀 폴렌티 전 미네소타 주지사는 “나라가 변하고 있고, 문화가 변하고 있고, 인구도 변하고 있고, 정치도 변하고 있다”며 공화당의 근본적 변화를 촉구했다. 공화당이 전통적 보수주의에 기반해야 하지만, ‘오늘의 미국’을 제대로 읽지 않고는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기 어렵다는 의미다.
특히 공화당 선거전략가들은 동성결혼이나 이민개혁에 유연한 입장을 보이지 않을 경우 대선 승리가 쉽지 않다고 보고 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자문역이었던 피트 웨너는 “공화당 후보들은 동성결혼 문제에 각을 세울 수가 없다”며 “도덕적 가치와 사회적 질서를 세우려는 어떤 노력도 고루한 ‘꼰대’처럼 비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릭 페리 전 텍사스 주지사를 지지하는 ‘수퍼팩’(super PAC·미국 연방선거법의 규제를 받지 않고 무제한으로 선거자금을 지원하는 조직)의 오스틴 바버르는 “오바마와 클린턴의 실정론을 내세우지 않고 동성결혼과 같은 사회적 이슈를 전면에 내세우면 대선에서 필패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인구학적 변화 추이를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공화당 내에서 커지고 있다. 백인·앵글로 색슨족·프로테스탄트(WASP)를 중심으로 한 주류의 인구가 퇴조하는 대신 히스패닉계 비중이 전체 인구의 20%에 육박하며 대선 판도를 좌우할 정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잠재적 대선주자인 존 카식 오하이오 주지사의 경우 ‘친절한 보수’(kindness of conservatism)이라는 화두를 내걸고 이민개혁 등 사회적 이슈에서 개방적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그러나 공화당 주자들로서는 ‘산토끼’ 못지않게 ‘집토끼’도 아울러야 할 판이어서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다. 공화당 경선에서 결정적 힘을 발휘할 전통적 지지층 사이에서 반(反) 오바마 정서는 더욱 강화되고 있다.
지난달 CBS와 뉴욕타임스가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88%의 공화당 지지자들이 ‘나라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응답했다. 같은 답변을 한 전체 응답 비율(63%)에 비해 크게 높다.
허커비 후보의 아이오와 주 유세에서 학교 양호교사인 마리 클레인(70)은 “개구리를 물에 넣고 서서히 가열하면 개구리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다가 나중에 죽는다”며 “지금 미국 사회가 그런 모양”이라고 주장했다.
기독교인인 토니 와스케(49)는 동성결혼 문제를 거론하며 “죄는 미워하되 죄인을 미워하지 말아야 하지만 더이상 참기 어려운 지경”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으로서는 공화당이 좌표를 잃은 채 ‘자중지란’의 상황을 즐기고 있다.
특히 공화당을 수구적 이미지의 “도널드 트럼프와 릭 샌토럼, 마이크 허커비의 당”이라고 덧칠하면서 민주당은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는 정당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유력 대선주자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공화당 후보들이 새로운 아이디어와 얼굴을 들고 나오더라도 결국 ‘과거의 정당’”이라고 비판했다.
이렇게 볼 때 적어도 사회적 이슈 면에서는 ‘신 진보주의’ 물결이 내년 대선의 흐름을 지배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워싱턴 정가의 관측이다. 그러나 정치권의 오랜 통설인 ‘시계추 원리’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면 일정시점이 지나 다시 보수주의 물결이 미국 사회를 덮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연합뉴스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