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용덕 서울대 행정대학원 명예교수
어떤 정치역학이 물밑에서 작동하는지 일반 국민으로서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국정을 함께 이끌어 가야 할 두 중심축 간에 빚어지는 현재와 같은 소통 부재와 그로 인해 발생하게 될 국정 운영 차질은 결국 대통령의 정치력 부족에서 비롯된 것으로 평가될 것이라는 점이다.
수정안이 수용되면 앞으로 국정 운영에 큰 변화가 초래될 것처럼 우려하는 시각도 납득하기 어렵다. 개별 법률에 대한 시행령의 위법 여부를 야당 단독으로 결정해 행정부에 그 시정을 ‘요청’할 수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행정부가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도 아닌 터에 ‘입법독재’ 운운은 지나친 기우로 들린다.
이번 국회법 개정안 논란을 좀 더 거시적인 맥락에서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국가란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공익 실현을 위한 제도들의 총합이다. 여기서 ‘명목상’이라는 접두사를 넣은 이유는 국가가 반드시 공익 실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해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국가란 자본가를 돕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좌파 이론이나, 자익 추구를 위한 개인들의 합리적 선택의 결과로 추진되는 국가 정책이 국익에 비합리성을 초래할 뿐이라는 우파 이론이 예다.
실제로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국가가 군주나 특정 종교 혹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 존재했던 경우가 허다했다. 정치행정의 근대화는 국가가 이처럼 특수이익을 넘어 공익을 도모하는 제도적 총체가 되도록 하기 위한 개혁 과정이었다. 그런데 공익이 무엇인가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수긍하고 따를 수 있는 개념 정의와 기준 설정이 쉽지 않다.
공익이란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의 이익을 합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보는 개인주의, 자유주의 시각과 단순히 개인이익의 합을 넘어 공동체 전체의 ‘일반이익’을 찾아 그것을 구현해야 한다고 보는 집단주의, 공동체주의의 시각이 대립한다.
개인이익의 합으로서의 공익이 구현되도록 하려면 그들의 이익이 상호 조정을 거치면서 상향적으로 결집되도록 하기 위한 제도화가 필요하다. 다양한 사회집단과 정당을 매개로 해 의회가 이 기능을 담당하는 핵심 국가 기구로 진화했다. 마치 ‘진흙탕을 헤쳐 나아가는’ 것처럼 혼란스럽고 예측 불가능한 다원주의적인 의회 과정으로부터 일반이익의 구현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일반이익으로서의 공익 구현은 개인들의 단기적 이익과는 한 단계 거리를 둔 행정부가 구조적으로 더 적합하다. 국민에게 직접 서비스를 제공하는 행정기구보다는 뒤에서 예산·조직 등을 배당하는 중앙관리기구들이 전체 이익 챙기기에 더 유리하다. 그러나 행정부가 일반이익을 정의하고 그것을 합리적으로 추진하는 데 필요한 보편적 기준을 어떻게 확보한다는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봉착한다. 일반이익의 이름하에 그들 자신 혹은 조직의 이익을 끼워 넣는 문제도 있다.
민주주의 선진국에서는 서로 대칭적인 이 두 시각의 공익을 절충하기 위한 제도화가 이뤄졌다. 자유주의 국가로 시작한 미국이 행정국가로 진화한 것, 국가주의 전통의 독일과 프랑스가 대의민주주의를 강화해 온 것이 예다. 우리는 강력한 집단주의와 국가주의가 배태된 나라다. 특히 자유주의가 위축되고 국가주의가 성행했던 15년(1972~1987)을 거친 이후 자유주의 확대와 국가주의 이완이 이뤄지고 있는 중이다. 이번 국회법 개정 논란은 이와 같은 큰 흐름의 변화 속에서 나타나는 미시적 불협화음의 하나로 이해된다. 결국 행정부와 입법부가 견제와 절충과 협력에 의해 개인이익과 일반이익의 조화를 꾀하는 운영의 묘가 관건이다.
이번 국회법 개정 과정 자체가 하나의 선례로 남을 수 있도록 정치인들의 노력을 당부한다.
2015-06-19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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